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문단 편집) == 희생자 == 승무원들이 처절하게 노력하는 동안 승객들은 비행기 구석구석에 유언을 새기고 마지막 사진을 찍어 남겨두었다. || [[파일:SzrBIsP.jpg]] || || {{{-1 (왼쪽 상단부터 순서대로)}}} || || 마리코(マリコ), 츠요시(津慶), 치요코(知代子). 부디 사이좋게 열심히 엄마를 도와주렴. 아빠가 이렇게 된 건 유감이구나. 분명 살아남을 수 없을 거다. 원인조차 알 수 없어. 이제 5분 지났다. (비행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어디를 향해 가는 거며, 어떻게 되는 걸까. 츠요시, 굳건하게 살아가거라. 다시는 비행기를 타고 싶지 않아. 하나님, 제발 살려 주세요. 어제 함께한 식사가 마지막일 줄은… 기내에서 뭔가 폭발한 듯한 모습으로 연기가 나고 있어. (아이들의) 엄마, 이렇게 되다니 유감이야. 잘 있어, 아이들을 잘 부탁해. 지금 6시 반이야. 비행기는 회전하면서 급속히 강하 중이야. 지금까지 정말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감사하고 있어. || * 카와구치 히로츠구(河口 博次, 향년 52세), 시체 겉옷의 안 주머니에 있는 메모장에 7페이지에 걸쳐 쓰여진 유서.[* 본 유서는 대한민국의 도서 중 아빠의 수첩에서 일부 내용이 각색되어 나온다. 참고로 아빠의 수첩에서 아빠가 당한 사고는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를 모티브로 하였다.] 당시 대학원 재학 중이던 [[장녀]] 마리코(河口真理子)는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학업으로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탓에 닷새가 지나서야 현장에 가서 동생과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한 후 수첩을 가져왔다고 증언했다.[* [[https://www.nikkei.com/article/DGXNASDG1000E_Q0A810C1CR0000/|니혼게이자이신문 2010-08-10 "아버지의 유언을 가슴 속에 간직한지 25년..."]]] || [[파일:external/blog-imgs-54.fc2.com/20120919011351bce.jpg]] || || 침착해 주세요. 벨트를 풀어서 소지품을 확인해 주세요. 짐은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 하이힐은 벗어 주세요. 짐은 들지 말아 주세요. 주변의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도와주세요. (중략) || * 객실 승무원 중 부사무장 츠시마 유미코(対馬 祐三子, 향년 29세)가 불시착에 대비해 남겼던 메모. 추락하며 미친 듯이 요동치는 비행기 안에서 자신의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든 극한의 상황에서도 승무원들은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파일:u4pygGo.jpg]] || ||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토할 것 같아. 마리코. || * 시라이 마리코(白井 まり子, 향년 26세), 비행 시각표의 여백에. || [[파일:LsaqBGF.jpg]] || || 기체가 크게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18:30 급히 하강 중. 수평 비행 중이다. 일본 항공 18:00 오사카행 사고. 죽을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료헤이. 모두 건강히 지내세요. 잘 있어. 스미코(須美子), 미키(みき), 쿄코(恭子), 켄타로(賢太郎). 18:45 기체는 수평으로 안정해 있다. 산소가 적어 불편하다. 기내에서 안간힘을 쓰는 목소리가 들린다. 기체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다. 18:46 착륙이 걱정이다. 스튜어디스는 냉정하다. || * 무라카미 료헤이(村上 良平, 향년 43세), 회사명이 적힌 봉투에.[* [[야마사키 토요코]]의 소설 '지지 않는 태양'이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는데 픽션이기에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지만 이 유서는 그대로 나온다.] 불행하게도 무라카미는 원래는 오사카에 갈 일정이 아니었으나 느닷없이 잡힌 출장으로 오사카로 갔다고 한다.이때 장녀인 미키(현재는 결혼해서 '오리타 미키(折田みき)'다)는 2018년 33주기 다큐멘터리에 직접 출연하여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건강히 지내세요"라는 메시지를 마음에 품고 열심히 살아 왔다고 고백했고 그녀는 사고 이후 국어교사로 근무 중이라고 한다. * 아버지인 타니구치 마사카츠(谷口 正勝)가 "마치코(まち子, 아이들(아츠시 • 마코토 誠)의 엄마[* 본명: 타니구치 마치코(谷口 真知子). 유서에서는 긴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이름 일부가 한자 대신 히라가나로 적혔다. 당시 40세.]), 아이들을 부탁해."라는 유서를 남기고 숨지자 [[장남]] 아츠시(篤志, 당시 13세)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고 소식으로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대신하여 직접 아버지의 신원을 확인했다. 죽음의 개념조차 다가오지 않을 어린아이가 혼자서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 후 충격에 빠져 비틀거리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전국에 생중계되면서 일본 열도를 슬픔에 빠뜨린 바 있다. 훗날 장성한 아츠시는 "'''아버지는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든든하고 근엄한 아버지라기보다는 항상 촐랑대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아버지가 그 무서운 순간에도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힘을 주려고 가족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유서를 남겼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고'''" 회고했다. * 당시 9세였던 미야지마 켄(美谷島 健) 군은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 참고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포수로 활동했던 [[https://ja.wikipedia.org/wiki/%E7%AB%B9%E4%B8%8B%E5%85%83%E7%AB%A0|타케시타 모토아키]]도 고시엔에 참가한 아들을 응원하러 가다가 변을 당했다.]이 보고 싶어서 오사카의 친척집을 방문하려 혼자 비행기에 탔다가 변을 당했다. 일본항공에서는 당시 어린이 VIP라고 해서 승무원이 현지 공항에서 보호자에게 직접 어린아이를 데려다 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켄 군의 어머니 미야지마 쿠니코(美谷島 邦子, 당시 38세) 씨는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비행기로 1시간 거리인 데다가 친척들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 준다는 이야기에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아이를 혼자 보냈다가 그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이에 혼자 아이를 보냈다는 죄책감,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서 아이가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을지에 대한 자책 등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이 여성은 몇 번이나 죽으리라 결심했으나 분명 자신처럼 자책감에 살 희망을 잃어버린 유족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유족들에게 위로 전화를 돌렸고 이것이 후일 '8.12 연락회'(8・12連絡会)라는 유족 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어 1985년부터 사무국장직을 맡으며 다른 항공사고 희생자 유가족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일본 지역 내 각 학교를 다니며 생명 강사로 활동하는 등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https://twitter.com/ken9sai|미야지마 쿠니코 트위터]]) 이 여성은 33주기를 맞은 2018년에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비행기가 추락한 오쓰타카 산 속에 위치한 위령비와 희생자들의 묘역, 그리고 8.12연락회의 활동 등을 소개했다.[* [[사카모토 큐]] 항목에 언급된 '천국에 있는 내 아이에게'라는 드라마가 이 여성의 시점으로 전개되었다.] * 이 사고로 당시 [[한신 타이거스]] 구단 사장 나카노 하지무(中埜 肇)도 목숨을 잃었는데 때문에 한신 선수들이 사망한 나카노 사장의 영전에 우승기를 바치자는 일념으로 의지를 불태워 그 해 21년 만에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한 데 이어 구단 사상 처음으로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다.[* 그런데 이 우승 때 [[커널 샌더스의 저주]] 사건이 생겼고 그 이후 38년 동안이나 [[일본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다.] 창단 50년만의 첫 우승이자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사망한 나카노 사장의 영전에 바친 선물인 셈, 나카노 사장은 구단 사장으로 취임한 후 사망하기 하루 전날까지 경기를 마치고 로커로 돌아오는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격려했고 그의 사고 소식을 접한 선수들의 충격은 아주 컸다고 한다. 사고가 났던 날 선수들이 받은 충격은 다음날 경기로 이어졌고 결국 사고가 났던 다음날 경기부터 일주일 뒤의 경기까지 한신은 모두 패배하면서 6연패에 빠져 버렸다.[* 이 때문에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잠시 1위를 내주면서 우승 실패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상단에 적혔다시피 다시 의지를 불태워서 결국 우승에 성공했지만.[[https://ja.wikipedia.org/wiki/%E4%B8%AD%E5%9F%9C%E8%82%87_(%E5%AE%9F%E6%A5%AD%E5%AE%B6)|일본어 위키백과의 나카노 하지무 항목]]에 따르면 한신 선수들이 후쿠오카에서 도쿄로 이동할 때 탔었던 비행기가 사고기였다고 한다. 당시 [[죽음의 원정|후쿠오카에서 한신과 주니치가 경기를 했기에]] 한신 선수들이 이용했던 것. 위에 서술된 대로 사고기는 당일 사고 몇 시간 전 하네다~후쿠오카 노선에서 비행했다. 만약에 선수단이 탔을 때 사고가 났다면...어쩌면 야구판 [[뮌헨 비행기 참사]]나 [[라미아항공 2933편 추락 사고|샤페코엔시의 비극]]이 일어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또 사고 닷새 뒤 시신 확인 시 그 해가 한신 타이거스 창단 50주년이라 특별히 제작했던 호랑이가 그려진 넥타이 핀을 착용하고 있어 불탄 넥타이 조각으로 신원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사고 당시 한신 주전 포수였던 [[키도 카츠히코]]의 아내 또한 이 항공편을 탈 예정이었으나 직전에 취소해 화를 면했다고 한다.] 아울러 이 사고 이후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들, 특히 모든 팀이 [[도카이도 신칸센|도카이도]] - [[산요 신칸센]] 연선에 몰려 있는 [[센트럴 리그]] 팀들은[* 사고가 터진 지 얼마 안 있어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원정경기 이동시 항공기 탑승을 재검토하겠다는 취지의 언론발표를 했다. 당시만 해도 [[신칸센 0계 전동차|신칸센 속도가 느려서]](210km가 최대 속도였고 [[도쿄역|도쿄]]-[[신오사카역|오사카]] 구간은 3시간 걸렸다. [[노조미(열차)|노조미]]는 당시 있지도 않았고 제일 빠른 게 [[히카리(열차)|히카리]]였다.) 항공기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생각하면 이 사고로 인한 여파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노조미가 생긴 1992년 이후에야 센트럴리그 전 팀이 [[4시간의 벽]] 범위 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신칸센을 주로 이용해서 원정을 다니게 되었다. 다만 [[홋카이도]]와 큐슈 양 끝단에 팀이 있는 [[퍼시픽리그]]의 경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경기에 해당되는데 이 두 도시를 비행기와 열차로 오간다면 이용시 각각 2시간, 8시간을 넘기게 되어 무조건 비행기 이용이 확정된다.]는 불가피하게 비행기를 타야 하는 상황. 또한 [[오키나와]]에 경기가 잡히거나 [[스프링캠프]]를 떠나는 경우에도 당연히 비행기다. ||<:>[[파일:우라카미 이쿠오.png|width=80%]] || ||<:>故 우라카미 이쿠오 당시 하우스식품 사장|| * [[글리코·모리나가 사건]]으로 협박을 받던 [[하우스식품]] 사장 우라카미 이쿠오(浦上 郁夫)도 사건 종결을 알리는 신문 기사를 읽고 오사카 본사와 창업주인 아버지 산소에 사건 종식을 알리러 가던 중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참고로 하우스 식품은 일본의 가정요리, 특히 거리에서 카레라이스를 시연 및 판매하며 처음 보급한 회사이며 우리가 흔히 아는 전자레인지에 넣어 손 쉽게 요리할 수 있는 '3분요리'의 시초가 하우스 식품이라고 할 수 있다. * 사고 다섯 달 전부터 [[이바라키현]] [[츠쿠바시]]에서[* 당시엔 군이었음.] 열리고 있었던 [[1985 츠쿠바 엑스포]][* 일본항공은 이 엑스포의 스폰서 중 하나였다. 사고기에도 츠쿠바 엑스포 기념 문구가 적혀 있었다.[[https://twitter.com/bnr34vsp2/status/1558039368995983360?s=61&t=4Ke2DInNv1-rdh-vKGvaAQ|#]]], 사건 전날 도쿄에서 개최되었던 [[코믹 마켓]]을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참가자, 관람객들 중에도 희생자가 많았으며 당시 동인계에서 촉망받던 동인 작가 히모토 코린(緋本 こりん, 본명은 이코마 아야코 生駒隆子)도 목숨을 잃었다. 한편 이 일로 자녀 셋을 한 번에 잃은 다부치 신고(田淵新吾) 씨와 그의 부인 테루코(田淵輝子) 씨의 사연이 2018년 33주기 다큐멘터리에 소개되었다. 다부치 요코(향년 24세 田淵 陽子), 미치루(향년 20세 田淵 満), 준코(향년 14세 田淵 純子) 세 자매는 여름방학을 맞아 여행을 가는 연년행사가 있었는데 늘 갔던 후쿠오카가 아닌 츠쿠바 엑스코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123편에 탑승했다가 모두 사망했다. 모친은 딸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술로 해소하며 살았고 남편은 그런 부인을 돌보며 심신이 황폐해지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에서 회고된 바로는 당시 사고 유가족들의 마음을 이용해 죽은 사람들을 볼수 있다며 돈을 뜯어내는 사이비 종교 단체가 있었으며 다부치 부인도 이에 넘어갔다고 한다. 다행히 아내의 이상한 행동을 눈치챈 남편이 달려가 아내를 말려서 범죄에 휘말리진 않았다고 한다.]그렇게 27년이 지난 후 2010년에 계속된 폭음으로 쓰러진 부인이 꿈 속에서 장녀인 요코를 만났는데 딸은 어머니에게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면서 강하게 질책하자 이에 마음을 고친 어머니는 이후 술을 끊고 뒤늦게 8.12연락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부부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전술한 33주기 다큐멘터리에서 부부 모두 80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험한 오쓰타카산에 올라 딸들의 묘를 찾는 장면이 방송되었다. ||<:>[[파일:塚原 仲晃.png|width=50%]] || ||<:> 츠카하라 나카아키라 당시 오사카대 기초공학부 교수 || 일본에서 대뇌 생리학에 한 획을 그은 대뇌 생리학의 권위자이자 [[오사카대학]] 기초공학부 전임교수였던 츠카하라 나카아키라(塚原 仲晃)도 1986년부터 문부성의 주도하에 시작 예정이었던 대뇌 가소성 연구를 대비해 사고 당일 협의를 하러 갔다가 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던 중 향년 51세로 변을 당했다. 실제로 츠카하라 나카아키라는 당시 세계적인 뇌 신경학자여서 일본 뇌 생리학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 학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36세의 젊은 나이로 오사카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시냅스, 기억에 관한 연구에서 세계를 선도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고인 사후 1987년 뇌의 가소성과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가노쿠니야 서점에서 책이 발간되었으며 사고 발생 25년 후인 2010년 이와나미 복간 문고에서 복간되었다. 또 일본 브레인 과학 진흥재단에서는 츠카하라 교수의 사후 업적과 공헌을 기리기 위해 '츠카하라 나키아키라 기념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참고로 사고 당시 츠카하라 교수와 위에 상술한 미야지마 켄(美谷島 健) 군은 같은 좌석에 탔다. 미야지마군과 츠카하라 교수 사이에 탔던 여성은 당시 도쿠시마현에 거주했던 노닌 치에코(能仁 千延子, 당시 향년 22세) 씨였다. || [[파일:external/asianwealthmag.co.uk/AWM-Porsche-007.jpg|width=100%]] || [[파일:external/i.telegraph.co.uk/jap1_1460333c.jpg|width=100%]] || || 바이올리니스트 유카와 다이애나 || 희생자인 유카와 아키히사와 왼쪽이 다이애나의 친모 || * 현역 바이올리니스트 겸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는 혼혈인 유카와 다이아나의 아버지 유카와 아키히사(湯川 昭久, 향년 56세)도 당시 비행기를 탔다가 희생되었는데 사고 발생 한 달 후 1985년 9월 16일 부인 수잔느 베일리는 [[유복녀]] 다이아나를 출산했다. 다이아나의 엄마는 남편을 잃은 후 [[영국]] [[런던]]으로 돌아가 생전 남편의 뜻이었던 음악가의 길을 따라 딸인 다이아나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2000년에 데뷔를 시켰다. 다이아나는 유복녀였기 때문에 유카와라는 성을 가질 수 없었지만 영국 법이 바뀐 뒤인 2009년 영국 고등법원 판결로 현재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여담]]으로 [[혼외자]]라고 한다. 유카와 아키히사는 영국에서 수잔느 베일리를 만날 당시 일본에 다른 부인이 있는 상태였는데 수잔느 베일리와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다가 언니인 유카와 캐시, 유카와 다이아나 자매를 출산했다고 한다.] 다이아나는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09년 8월 12일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한 520명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음반도 제작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듣고 즐거움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포부를 밝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